이쁜왕자 만쉐~~
[잡담] 선착순은 진리인가? 본문
선착순은 진리인가?
세상에 수많은 예약 시스템은 '선착순'을 원칙으로 한다. 먼저 예약하는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내 주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선착순의 폐해도 당연히 만만치 않다.

몇 년 전만 해도 명절이 다가오면 항상 뉴스에 나오던 장면으로, 길게 줄 서 있는 귀성길 예매 모습이 있다. 기차 예약 시스템은 당연히 선착순으로 운영되니, 줄 서서 표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공정성을 위해서 같은 시각부터 동시에 진행되기에 그 전까지는 줄서서 기다리는 거 말곤 할 게 없다. 그리고, 아무리 숙련된 직원이더라도 한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약이 개시된 이후에도, 뒤에 줄 서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순번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다. 이런 시스템은 '시간'을 소모하는 시스템이다.

어떤 특정한 신제품이 출시일이 되면, 이를 빠르게 구하기 위해서 미리 줄서 있는 모습은 매우 흔해졌다. 그런데 빠르게 줄 서다 못해, 하루를 넘기다 못해 텐트 쳐 놓고 며칠 동안을 기다리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 역시 '시간'을 소모하는 시스템이다. 그 집념과 노력을 이해한다 쳐도, 나는 절대로 못할 일이다.

예약 시스템은 어느 새인가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도 이것으로 넘어가는 것을 겪은 세대인데, 바로 '수강신청'이라는 시스템이다.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직접 고른다는 좋은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현실은 A폭격기 교수님의 수업을 따내기 위한 전쟁터였다.
초창기에는 컴퓨터란 것은 매우 비싼 물건이기에 아무나 소유하지도 못했고, 또한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다. 수강신청을 하려면 학교의 전산실이라 불리는 곳에 직접 가서 신청해야 했다. 당연히 전산실 앞은 수강신청 대기를 위한 줄이 길게 늘어 졌고, 위의 영상 처럼 밤샘 줄서기를 하는 경우는 특이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밤샘 줄서기 끝에 A폭격기 교수님의 수업을 하나라도 따낸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컴퓨터가 좋아 지고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이제 밤샘 줄서기 같은 건 필요 없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컴퓨터 또는 PC 방 컴퓨터 심지어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즉시 수강신청을 할 수 있게 바뀌었다. 이제 밤샘 줄서기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수강신청은 단 1초 차이로 수강 여부가 결정되고, 이는 졸업 학점에 까지 영향을 주는 매우 곤란한 시스템이 되었다.
물론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각 대학교마다 자체적으로 학년 별, 전공 별로 구분하는 식으로 보완을 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수업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컴퓨터를 이용한 예약 시스템은 현재라고 해서 딱히 다르지 않다. 각종 인기 스포츠나 유명 가수의 콘서트 예약은 초 단위로 예약이 마감되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되팔이 암표상들이 껴 들어서 매크로를 이용하여 수 밀리 초를 따지는 하이테크의 향연이 된 지 오래이다.

참고로, 추첨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오래전 부터 나오고 있긴 하다. 추첨 시스템이라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무지성으로 일단 찔러본다는 생각으로 추첨에 도전하기에 경쟁률이 무시무시하게 높아진다는 것이 첫번째 단점이다. 게다가 선착순 예약 시스템이라면 시간에 늦어서 깔끔하게 포기할 사람들도, 늦게라도 추첨에 도전하기에 경쟁률은 더 올라 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추첨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추첨 비리'를 해결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10000명짜리 콘서트에 10만명이 몰렸다고 치면, 이 정도 규모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한 추첨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 말고는 해결할 수가 없는데, 그 과정에서 비리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비리가 일어난 것도 한두건이 아니기도 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예약 시스템은 또 다른 문제를 파생했는데, 일명 '디지털 소외 계층'이라는 문제이다. 아무래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은, 이를 이용한 예약 시스템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된다. 남들은 딸깍으로 예약에 성공할 때, 스마트폰 부여잡고 씨름하다 보면, 이미 예약은 꽉 차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이 들은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지 못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KTX , 고속버스 등의 교통 예약 시스템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과거에는 고령의 몸을 끌고 나가 밤샘 줄서기를 하면 매우 힘들더라도 명절 귀성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사람들이 아예 티케팅을 못하는 수준이 되었다.
현대의 예약 시스템은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찰나와 같은 시간 사이 결정되어 버리는 또 다른 형식의 시간의 족쇄를 차게 되었다.